"날아 오르는 새를 촬영하기 위해, 돌을 던지지 마라"

'풀숲에서 날아 오르는 꿩'을 촬영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리얼'이라면, 꿩이 있을 법한 풀숲에 초첨을 맞추고, 꿩이 날아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 풀숲에 꿩이 없다면? 만약, 당신이 PD라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꿩이 날아 오르는 모습'을 찍자고, 하루 온종일 풀숲에 카메라를 받쳐 놓고 있지도 않은 꿩이 날아 오르길 기다릴 수 있을까? 거기다, 그 하루로 인해, 장비 대여료, 인건비, 진행비 등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수백만원이라면?
극단적인 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지금 이순간, 어디선가 진행되고 있는 촬영현장에서는 이와 비슷한 고민을 누군가 치열하게 하고 있을게다. 거기다가, 자유의지로 날아 오르는 꿩의 모습과 촬영스텝이 던진 돌에 놀라, 날아 오르는 꿩의 그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 이르면, 그 고민의 폭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어디 자연 다큐멘터리뿐인가? 이번에는 연예인의 하루를 '리얼하게' 전해주는 오락 프로그램의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이 집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 아주 간단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리얼'로 촬영하자면, 카메라는 언제 나올지 모르는 주인공을 기다리며 문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만약, 주인공이 마음을 바꿔먹고 아예 나오지 않는다면?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연출이 가미된다. 대체로 이런 상황.
# 아파트 문앞
(촬영스텝, 문밖으로 나간다)
- 주인공 : 언제쯤 문 열고 나갈까요?
- 촬영자 : 신호주면, 10초후에 나오세요.
(문이 닫힌다)
- 촬영자 : 자, 카메라 돌았습니다.
(10초후, 주인공이 태연하게 문을 열고 나온다)
누군가 이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그게 무슨 '리얼'이냐고 항의를 할 수도 있다. 이 장면 하나를 근거로 프로그램 전체를 '사기'라고 몰아부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사실, 원칙대로 따지면, '리얼'이 아닌 '연출'인 바, 욕 먹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제작진은 좀 억울할 게다. 극적 구성과 촬영상의 편의를 위해, 최소한의 연출이 가미됐을 뿐, 문을 열고 나오는 '팩트(fact)'는 왜곡하지 않았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말이다. 이같은 상황 때문에 방송계에는 암묵적인 가이드 라인이 존재한다.
다시 '리얼'이 생명인 자연다큐멘터리를 예로 들어보자.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과정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상황중 하나. 산비둘기의 생장과정을 소개하기 위해, 몇 달 동안 산비둘기 둥지를 촬영해 왔는데, 아뿔싸, 잠시 카메라가 석양을 찍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지나가던 구렁이가 주인공 산비둘기알을 '꿀꺽'한 상황이라면?
이럴 때 연출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하나는 몇 달간 고생해서 만들어온 다큐멘터리를 몽땅 포기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약간의 연출장면'을 사용해서 완성하는 것. 시간에 쫓기며 제작해야 하는 한국방송계의 사정상, 제작을 중도에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연출장면이 삽입된다. 어떻게?
일단, 계속 촬영해왔던 둥지를 스튜디오로 옮긴 후, 주인공 산비둘기알과 가장 흡사한 알을 구해 담아 놓는다. 물론, 카메라의 구도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최대한 현장과 비슷하게 꾸미는 게 철칙이다. 셋팅이 끝나면, 최소 4대 이상의 카메라를 설치한 후, 며칠 굶은(?) 구렁이를 풀어 놓아 알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대체로 하루 정도만 고생하면, 구렁이가 산비둘기알을 '꿀꺽'하는 결정적 장면을 찍을 수 있다.
편집은 자연에서 찍은 컷과 세트에서 찍은 컷을 적절히 배치하고,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음악을 배경으로, 구렁이가 둥지를 엄습하는 순간과 구슬피(?) 지저귀는 어미새의 모습을 교차하면, 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안방까지 전달된다. 이 얼마나 리얼하고 극적인 장면인가? 자,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조작'인가. '리얼'인가?
구렁이가 알을 꿀꺽한 '팩트(fact)'는 왜곡되지 않았다. 다만, 그 장면이 '연출된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건 명백히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벗어난 행위이다. 이런 경우, 제작진은 '연출된 장면'임을 밝히는 게 원칙이다. 이게 바로 제작진의 도덕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점이다.
물론, 과거에는 연출임이 분명한 화면을 '리얼'이라고 우기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그 결정적 사건이 바로 다큐멘터리 '수달' 사건이었다. 보호상태의 수달을 자연상태의 수달인 것 처럼, '팩트(fact)를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수달의 죽음을 보다 감동적으로 구성하고자 연출한 장면을 '리얼'로 포장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제작진은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한국방송계에 만연했던 '연출 저널리즘'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향은 또 어떤가. '연출된 장면'이 없는 자연 다큐멘터리일지라도 '폴리(foley)' 라는 사후작업이 필수적이다. 쉽게 말해서. 극적 효과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채집한 음향이외에, 인위적으로 녹음한 음향이 삽입된다는 뜻이다. 풀벌레 소리, 바람소리, 새들이 '푸드득~'거리는 날개짓 소리는 물론,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밟고 오르는 소리, 노루가 낙엽을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현장에서 채집한 동시녹음 음향만을 쓰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음향이 추가로 입혀진다. 자, 그럼, 이 다큐멘터리에는 '가짜 음향'이 사용됐으니, '리얼'이 아니라, '조작'된 다큐멘터리일까?
요즘들어, '리얼'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던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조차 '리얼' 을 테마로 삼기 시작하면서, '리얼'과 '연출', 조작'과 '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상황을 놓고 가끔 논쟁이 벌어진다. 물론, 논쟁의 중심은 항상 인터넷이다. 항상 누군가의 제보(?) 또는 제보를 빙자한 소설(!)에서 출발해, 누군가의 사과로 끝나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어찌됐건, 빛의 속도로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 세상이니, 어설프게 '리얼'을 주장했다가는 뼈도 못추리기 쉽상이다. 따라서, 요즘 방송계에서 '의도적인 조작'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만큼, '팩트(fact) 를 왜곡하는 연출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을 둘러싼 논쟁이 심심치않게 벌어지는 이유는 뭘까?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 '라쇼몽'을 통해 설파했듯이, 누군가의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거짓'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직접 목격한 '사실' 조차, 관점과 시점에 따라, '진실'일 수도, '거짓' 일수도 있으니, 이른바 '리얼'을 둘러싼 논쟁은 항상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위의 예시에서 언급했듯, 제작진은 보통 촬영상의 편의를 위해, '팩트(fact)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까지를 허용수준으로 보는 반면, 시청자는 '리얼'이라는 말 그대로의 원칙적 기준을 내세워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합리적 원칙이나 기준 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세몰이'의 영향력에 따라 잘잘못이 가려진다. 가뜩이나 경계가 모호한 마당에, '명문화된 규정'은 커녕, 사회구성원들의 '암묵적 동의'마저도, 언제, 어떤 프로그램이 걸리느냐(?)에 따라 수시로 달라지는 터이니, '리얼'에 관한 논쟁은 대체로 방송문화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 논쟁에 그치고 만다.
비록, 그 경계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을 지라도,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끊임없는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사회적 기준점을 세우고 수정해 나가도, 수십년은 족히 걸릴 작업이건만,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공에 날리고 있다. 하기야, 주무부서라고 할 수도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조차, '청기와집'에만 온신경을 집중한 터이니, 그 누가 방송철학의 발전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더 솔직히 말하자면, '풀숲에 던진 돌'이나, '구렁이가 꿀꺽한 산비둘기 알' 따위에 신경쓸 시청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떳다', '무한도전'에 스치듯 등장하는 '숭어잡기' 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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